본당과 공소/서울대교구

[서울]혜화동 성당

알타반 2008. 1. 13. 21:33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

교회 건축, 미술 발전 이끈 선구자


1. 지금의 성전이 건립되기 전 초창기 혜화동성당 모습. 혜화동 언덕에 있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1927년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함에 따라 남게 된 수도원 목공소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2. 1960년에 완공된 혜화동성당은 반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 성당과 비교해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미를 자랑하는 한국교회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정면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부조는 김세중(1928∼86년)씨 작품이다.3. 혜화동성당 내부 전경. 성전에 있는 미술품 대부분이 대가들의 고뇌와 땀이 녹아있는 작품이어서 혜화동성당은 명실공히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고 불린다.
젊음과 낭만이 넘실대는 문화의 거리, 서울 동숭동 대학로.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저녁만 되면 발디딜 틈 없는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다. 하지만 혜화동 로타리 쪽으로 올라가면서 이런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진다. 웬만한 신자라면 교육 때문에 한두번은 꼭 가봤을 동성고 정문을 지날 때쯤 대학로의 번잡스러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로타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게 되면 대학로와는 전혀 다른 고즈늑한 분위기와 만나게 된다. 로타리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푸르른 숲 속에 파묻혀 있는 신학교를 등에 지고 동성고와 맞닿아 있는 혜화동성당(주임 김철호 신부)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림동성당(1892년)과 명동성당(1898년)에 이어 서울에서 세번째(1927년)로 설립된 혜화동성당. 명실공히 '믿음의 고향'이요, 한국교회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먼저 혜화동성당이 이곳에 자리잡게 된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서울 한복판 교통의 요지인 혜화동 언덕에 나란히 붙어있는 신학교와 혜화동성당 그리고 동성고등학교가 가장 감사해야 할 이는 독일 성베네딕도회 회원들이다. 조선대교구장 뮈텔 주교가 한국교회 교육사업을 맡아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들이 낙산 아래 백동(柏洞, 혜화동의 옛 지명)의 전망 좋은 땅 3만평을 구입해 수도원을 세운 것이 1909년. 새로 설정된 원산대목구를 맡게된 베네딕도회가 1927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김으로써 경성교구가 백동 수도원 땅을 매입하게 됐고, 이 수도원 터에 지금의 신학교와 혜화동성당, 동성고가 들어선 것이다.

당시 수도원 땅은 백동은 물론 지금의 대학로 자리인 동숭동 일대까지 뻗쳐 있었는데, 동숭동 터는 일반에 매각했다고 한다. 이 일대가 지금처럼 발전하리라고는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벽안 선교사들의 땅을 보는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더불어 대학로 땅을 그 때 교구가 다 매입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나마 전부를 일반에 넘어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1927년 4월29일 설립된 혜화동본당은 수도원 목공소를 개조한 성당으로 출발했다. 초대 주임은 시잘레(파리외방전교회) 신부. 목공소 건물에 종각을 세워 만든 40평 규모 성당은 1950년대에 이르러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건물이 낡기도 낡았지만 신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 3000여명에 이르는 교우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아진 것이다. 이에 7대 주임 정원진 신부는 1954년 '신축 성당 건립 기성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장면(요한, 제2공화국 국무총리 지냄) 박사를 회장으로 임명하고 성전 신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교우들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어 혜화동본당은 1960년 5월25일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역사적인 성전 봉헌식을 갖는다.

혜화동성당은 한국교회건축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기념비적 성당으로 평가된다. 교회건축 전문가 김정신(스테파노, 단국대) 교수는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에서 "건축 전문가에 의해 설계된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건물인 혜화동성당은 1960년대 이후 보이기 시작한 근대 지향 성당 건축의 선구자적 건물로, 종탑의 형태나 창의 모양 등 모든 의장적인 면이 탈양식적이며 근대 건축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건축사적 의의를 밝혔다.

그래서일까. 혜화동성당이 지난 1960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말하면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반백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 성당과 비교해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적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 건물 뿐만이 아니다. 혜화동성당은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나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가톨릭미술 대가들의 작품 아닌 것이 없다. 정웅모(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신부는 '교회미술 이야기'에서 "이 성당 건립에 내로라하는 가톨릭 예술가들의 정성이 하나로 집결되었기 때문에 이 성당을 건축하면서 한국교회 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성당 건립은 장발(루도비코, 1901∼2001년, 장면 박사 동생) 당시 서울대미대 학장의 지휘로 이뤄졌다. 설계를 맡은 이는 이희태(요한, 1925∼81년)씨. 이후 절두산순교기념관도 설계하게 되는 이씨는 당시 대다수 건축가들이 모더니즘과 국제주의 건축을 수용하고 소화하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기존 성당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성을 살려나간 독창적 건축가였다.

성당을 바라볼 때 정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 화강석 부조다. 1961년 김세중(프란치스코, 1928∼86년) 서울대 교수가 원도를 작성하고 장기은 교수와 함께 조각한 이 부조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요한 14,6),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가 21,33)는 성서 구절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사가가 좌우에 자리잡고 있는 모습으로 제작됐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손가락 세 개를 펴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의미하며, 품에 안고 있는 지구의는 인간 세상을, 그 위 십자가는 세상 죄에 대한 구세주의 승리를 나타낸다. 아울러 부조 왼쪽부터 사자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사자 함성에 비유하면서 복음서를 시작한 마르꼬를, 독수리는 솟구치는 영감을 글로 담은 사도 요한, 날개달린 남자는 복음서 첫머리에 예수 족보를 추적하고 있는 마태오, 그리고 황소는 주의 제단에 놓은 즈가리야의 희생물을 연상시키는 루가를 상징하고 있다.

하느님 숨결 녹아있는 가톨릭 미술의 '보고'


1. 혜화동성당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103위 순교 성인화. 문학진 화백이 1977년에 완성한 이 그림은 김대건 신부가 아닌 외국인이 가운데 서 있을 뻔한 사연을 안고 있는 작품이다.2. 김세중 교수 작품인 성 베네딕도상. 성당터는 원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자리였다.3. 성당 오른쪽 창에 있는 성부(왼쪽부터)·성자·성령 유리그림. 엷고 단순한 색으로 제작된 유리그림은 굴절이나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빛의 효과를 한층 잘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4. 권순형 교수가 1979년에 제작한 제대
 혜화동본당 주보 성인은 누구일까.

 혜화동성당 터에 원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힌트. 그렇다면 정답은? 짐작한 대로 '베네딕도'성인이다. 혜화동본당은 성당 정면 '최후의 심판도' 바로 왼쪽에 성 베네딕도상을 새겨 이를 기리고 있다. 1961년 김세중(프란치스코) 교수가 제작한 이 작품은 서방 수도생활의 스승으로 불리는 성 베네딕도(480?∼550?)를 단순하고도 기하학적 터치로 표현한 화강석 부조로, 성인이 들고 있는 지팡이와 책은 각각 착한 목자와 하느님 말씀을 상징한다.

 성당 밖에서 최후의 심판도와 베네딕도상 부조를 감상했다면 실내를 둘러볼 차례다. 성전에 있는 미술품 치고 대가들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기에 명실공히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고 불리는 혜화동성당. 예술작품에 관한 전문적 식견이 없더라도 경건한 마음가짐과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작품 하나하나를 음미한다면 작가의 손을 빌려 드러난 하느님의 숨결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 200년 역사를 통틀어 대표적 성화 하나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바로 '103위 순교 성인화'(1977년, 285×330㎝)다.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을 계기로 한국교회 공식 성인화가 되다시피한 이 그림이 걸려있는 곳은 혜화동성당 제대 앞 오른쪽 벽면이다.

 1976년 박희봉 혜화동본당 주임신부로부터 '103위 순교복자성화'를 의뢰받은 문학진(토마스, 1924년∼) 화백은 10개월 동안 전례·역사·복식 전문가들에게서 자문을 얻고 한국적 주체성을 살려 103위 한분한분 표정을 특색있게 그려냈다. 시대와 신분이 각기 다른 순교자들이 기쁨에 가득찬 모습으로 천국 개선을 기다리는 이 그림은 보는 이에게 푸근한 감동과 평화를 안겨준다. 서울 도봉산의 아름다운 산세가 배경이 됐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이 처음 구상될 때는 명동대성당에 있는 '79위 복자(福者) 성화'와 같이 앵베르 주교를 중심으로 순교복자들이 좌우 대칭으로 호위하고 있는 구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문 화백은 "외국인이 중앙에 있으면 주체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박갑성 교수(문 화백 대부) 지적을 받아들여 원래 외국인 자리였던 가운데에 김대건 신부를 모시고 김대건 신부 자리에 외국인을 옮겨놓았다. 당시 '쿠데타'라고까지 표현된 이 사건은 한국교회 성미술이 토착화 단계에 접어든 것을 상징하는 큰 결실이었다.

 혜화동성당 유리그림(스테인드글라스) 29점은 모두 이남규(루가, 1931∼1993년) 교수 작품이다. 1980년 1차로 오른쪽 창에 제작된 유리그림 4점은 각각'나는 길, 진리, 생명이다(332×518cm)''성부''성자''성령'(각 270×230cm)을 주제로 하며, 3cm 두께의 두꺼운 유리를 사용한 달 드 베르(Dalle de verre) 방법으로 제작돼 굴절이나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빛의 효과를 한층 잘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1980년 5월4일자 혜화동본당 주보에서 이 작품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로부터 성부는 둥근 원으로 상징되었는데, 원 속에 파랑·노랑·빨강 삼원색을 배치했다. 이 삼색이 늘 움직이는 생동감을 갖게 함으로써 우주창조의 신비를 나타내려고 했다. 성자는 십자가와 가시관의 고통, 그리고 승리의 월계수로 되어 있다. 성령은 비둘기와 주변의 빛으로 구성했다. 성부·성자·성령은 특별히 성당 내 밝기와 순교자 성화에 주는 영향을 고려해 엷고 단순한 색으로 작업했으며, 가능한 한 강한 색의 효과를 피하였다…."

 왼쪽 창과 좌우측 상단 조그만 창 유리그림 작업은 1989년부터 91년까지 진행됐다. 이 유리그림들은 성 베네딕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성녀 소화 데레사, 천지창조 등 매우 다양한 주제로 이뤄져 있다. 혜화동성당 유리그림은 천지창조에서 성령강림에 이르는 구세사를 일정한 선의 흐름과 색조의 조화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성당 전체에 해맑은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평가다. "예술가의 최종 목적은 신이 부여한 자신의 내면적 생명을 드러내는 일이다'라는 작가의 예술관을 온전히 맛볼 수 있는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제대 정면을 바라보면 십자고상과 함께 좀처럼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든 울긋불긋한 그림이 제대 벽면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냥 그림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조각(25×25㎝)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큰 그림을 이룬 도자 벽화임을 알 수 있는데, 작가는 국내 최정상급 도예가인 권순형(프란치스코, 1929년∼) 교수다. 권 교수는 1979년 도자 벽화를 제작하면서 가식적 손질이나 덧붙임 없이 아주 단순하게 처음에 구상한 그대로를 도판에 표현했다고 한다. 5개월에 걸친 각고의 작업 끝에 탄생한 벽화의 주제는 '성사'(또는 신비)로, 우주의 신비에서 시작해 성사생활을 통한 신앙의 성장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벽화에서 황갈색은 풍요로운 밀밭을, 청록색은 심오한 우주 자체와 함께 주님 포도밭을 상징하고 있다. 또 빛의 원천인 야훼 하느님을 상징하는 둥근 태양(원)은 작품의 생명이자 정점이다. 이 벽화는 보는 이가 묵상하는 가운데 그 뜻을 깨닫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며, 기도하는 성전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뒀다. 아울러 이 작품은 성전 오른편에서만 자연 채광이 된다는 점을 고려해 벽면 전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간 돌려놓고, 색깔을 내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등 단순한 평면작업이 아니라 포괄적 공간예술로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문화와 신앙의 요람으로 '우뚝'


1. 혜화동본당 신자들이 성당 오른편 로사리오 기도 길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2. 1958년 김세중 교수가 청녹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 당시 본당 사목회장이었던 장면 박사가 세례대와 함께 본당에 기증했다.3. 우리 어머니와 누이를 꼭 닮은 성모상(최종태씨 작품)은 절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4. 성전 입구에 있는 부활성수대. 이종상 화백이 제작한 성수대 위에 예수 부활상(임영선 교수 제작)을 얹은 합작품이다. 5. 제대 왼편 감실은 최봉자
 지난 호에서는 혜화동성당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들 가운데 103위 순교성인화나 유리그림, 도자벽화 등 덩치가 큰 대작들을 중심으로 둘러봤다. 이번에는 나머지 작품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 여러차례 강조한 대로 어느 작품 하나 걸작품 아닌 것이 없으니 정신을 바싹 차리는 것이 좋겠다.

 혜화동성당 현관 문을 열고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부활성수대다. 이종상(요셉, 66, 서울대 명예교수) 화백이 1994년 제작한 성수대 위에 예수 부활상(임영선 교수 제작)을 얹은 합작품으로, 그리스도 성혈을 상징하는 암적색 화강석 성수대 위에 황동으로 주조된 상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채 못자국이 선명한 두 손을 포개 얹고 있는 모습이다.

 못자국이 있는 두 손을 크게 강조한 것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함이요, 몸 전체를 상하로 가늘게 과장한 것은 승천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자세히 보면 못자국이 많이 닳아 손등이 반들반들하다. 예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어 그리스도의 고통과 부활에 동참하고픈 수많은 신자들의 손길 때문이리라.

 5000원권 지폐에 나오는 율곡 이이 영정을 그린 화가로도 유명한 이종상 화백 작품은 또 있다. 교육관 지하 소화성당(소성당) 입구에 있는 성녀 소화데레사상(1993년)이다. 작가가 처음 이 상을 제작할 때는 아주 독창적 작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도중에 강한 계시를 받고 겸손되이 모든 것을 성령의 뜻에 맡긴 채 손만 도구로 삼아 제작에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 이름도 '성녀 소화데레사 성령상'으로 정했다.

 1958년 김세중 교수가 청녹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는 당시 본당 사목회장이었던 장면 박사가 본당에 기증한 것이다. 제대의 청녹색과 조화를 이루며 경건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제대 십자가 역시 1958년 김세중씨 작품. 제대 왼편 감실은 1993년 최봉자(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가 디자인한 것으로, 중앙의 빨간색은 성체등 즉 성심(聖心)을 나타낸다.

 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은 혜화동성당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작가 작품이다. 주한 미국대사관에 부임한 남편을 따라온 조각가 핸더슨 부인이 1960년께 장발 교수 자문을 받아 황동부조로 제작한 이 작품은 변형되고 과장된 인체 표현을 통해 극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과감한 남성적 터치로 예술성을 한껏 살렸다는 평을 듣는다.

 성전 바깥으로 나와 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서 있는 성모상은 참으로 푸근한 인상이다. 대다수 성모상이 얼굴 갸름한 서구 미인형이라면 혜화동성당 성모상은 둥글둥글한 아줌마형이라고나 할까. 평소 한국교회 성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라면 이 성모상을 제작한 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맞추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바로 최종태(요셉, 72, 서울대 명예교수)씨다.

 성미술 토착화의 선구자인 최씨가 1996년 화강석으로 제작한 이 성모상은 철저히 한국 국적을 가진 성모상이다. 성모 마리아가 서양 사람이 아닐뿐 아니라 작가 자신이나 신자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엄마와 누이 같이 친근한 성모 마리아를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그래서 여느성모상들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아늑한 느낌이 절로 드는 교육관 지하 소화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감실은 권순형(프란치스코) 교수가 1968년 제작한 것으로, 원래 대성전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성체 안전을 위해 기능적 면을 최대한 살려 견고하게 제작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물고기 세 마리를 새겨넣음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다.

 혜화동성당은 최봉자 수녀의 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의 작품이 많다. 성당 외부 및 소화성당 십자가의 길(1992년)과 소화성당 십자고상과 성체등, 성당 마당 로사리오 기도(1994년) 등이 최 수녀의 손을 빌어 세상에 선보인 작품들이다.

 주옥같은 성미술 작품이 한데 모인 혜화동성당 바로 앞은 젊음과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다. 가톨릭을 대변하는 성미술과 혼을 빼듯 열정적인 신세대 문화의 진수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모습은 역설적이다.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혜화동 일대가 서울 강북에서 사통팔달 안 뚫린 데가 없는 교통 중심지라는 것.

 혜화동본당 김철호 주임신부는 "혜화동성당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찾아와 평화를 맛보는 명동성당과 여러모로 비슷하다"며 "혜화동성당을 문화와 신앙의 요람으로 가꿔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명동성당을 찾는 이들 가운데 명동본당 신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혜화동성당에도 오며가며 들러 기도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좀더 스스럼없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김 신부는 또 혜화동성당이 지니고 있는 성미술품들을 널리 알리는 노력과 함께 젊은이들의 문화 공간과 함께 있다는 특성을 살려 이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도 좀더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에게 성당 마당을 공연장으로 개방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는 게 김 신부 생각이다.

 서울에 사는 이라면 일년에 한두번쯤은 대학로에 갈 일이 있기 마련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대학로에서 볼 일을 마쳤다면 머리도 식힐 겸 발걸음을 혜화동 로터리쪽으로 돌려 혜화동성당을 찾아가보자. 대학로에서 가까운 곳에 그토록 다른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성미술 걸작들을 감상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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