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재 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 |
지리좌표
| 황사영 묘소 앞 북위 37°44′28″ 동경 126°58′38″ |
문 의 처
| 의정부2동 성당 |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고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족보를 확인하는 어려운 작업 끝에 간신히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위치해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거의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가 북경에 보내려 한 백서가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 준 굳건한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신앙의 귀감이 되겠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묘가 하루속히 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明問)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正祖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으며 이에 그는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 든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른다.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약종은
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이로써 그는 부귀 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잘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된다.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22행, 1만
3천3백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 간의 골육 상잔(骨肉相殘)의 당쟁이었음을 피력하고, 세 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 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돼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찾아가는 길 |
서울 구파발이나 의정부 쪽에서 송추에 이르러 부곡리 쪽 길을 다라 2.7Km정도 거리에
있다. 서울 교회선을 타고 송추역에서 하차해도 된다. 인근에 송추 유원지, 장흥 계곡, 일영 유원지 등 놀이터가 산재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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