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원동 언덕에 자리잡은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園洞)성당. 언뜻 보면 그다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성당일 뿐이지만 지난 100여년간 강원도 지역 선교의 요람으로, 특히 70년대는 반독재 투쟁의 불씨를 지피며 민주화 운동의 기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원동성당이 한국 교회사에 써온 이력은 결코 녹록치 않다. 작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원동성당은 규모가 아닌 내실로 따지자면 어느 교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원주교구와 닮은 꼴이다.
교구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이 주교좌본당으로 지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원동주교좌본당은 1888년에 설립된 강원도 최초의 본당인 풍수원본당과 부엉골본당에 이어 1896년에 설립된 세번째 본당이다. 그러나 1896년
부엉골본당의 부이용(Boullion) 신부가 충청도 장호원에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떠나고 부엉골본당이 공소로 격하됨에 따라 실질적으로는 두번째
본당인 셈.
원주본당(원동본당의 옛 이름)은 풍수원본당의 르메르(Le Merre,1896∼1898년 재임)
신부가 원주 상동리(현 가톨릭센터 자리)의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구입하고 1896년 8월17일에 부임함으로써 설립됐다. 당시 신자
수는 1134명, 관할 공소는 20개였는데 원주읍내의 신자는 3명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신자는 공소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성당 부지를 매입한 이는 제3대 드브레(Deverd, 1900∼1906년 재임) 신부였다. 6년동안 재임하면서 교세 확장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온 드브레 신부는 1902년 사제관 부근의 가옥 열두채와 부지 2천여평을 구입해 성전의 터전을 마련했으며, 제4대
시잘레(Chizallet, 1906∼1908년 재임) 신부는 2년간 500여명에게 세례를 주는 한편 성당 신축을 대비해 목재를 비축했다. 이
같은 준비에 힘입어 제5대 조제(Jaugey, 1909∼1923년 재임) 신부는 1913년 건평 70평 규모의 고딕식 성당을 신축하고 경성교구장
뮈텔(Mutel, 1890∼1933년 재임)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 성당은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초 유엔군의 오폭으로 인한 화재로 다 타버리고 만다. 1951년 피란에서 돌아온 신자들이 불에 탄 성당의 벽돌들을 정성스럽게 고르고 다듬어
소성당을 지었는데, 이 소성당은 새 성전이 신축된 다음 소화유치원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교리실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의 성당 건물이
세워진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가을이었다. 제17대 이 바드리시오(Patrick, 1950∼1955년 재임) 신부는
소성당을 완공한 직후부터 파괴된 성전의 재건을 서둘렀다. 그는 1953년말 중국인 가(賈)씨에게 기본 설계를 맡기고 외국의 독지가들에게 편지를
띄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듬해 5월부터 시작된 기초공사에는 주로 남자 교우들이 동원돼 작업을 진행한데 이어 6월부터 시작된 벽돌쌓기에는 여자
교우들과 학생들까지 동참해 벽돌을 날랐다.
성전 공사는 모든 본당 교우들이 합심한 가운데 순조롭게 진행됐으며, 9월에는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어 120평 규모의 새 성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새 성전의 축복식은 1954년 10월 당시 원주본당이 속해 있던 춘천교구의
교구장 구 토마스(Quinlan Thomas, 1945∼1966년 재임) 주교의 주례로 거행됐다.
1957년 학성동본당을
분할하면서 ‘원주’에서 ‘원동’으로 이름을 바꾼 원동본당은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됨에 따라 그 해 6월 원주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설정됐다. 초대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착좌를 지켜보면서 원주교구 선교의 중심으로 떠오른 원동성당은 이후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서면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전면에 등장한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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