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베스트 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화두로 던졌다. 그냥 봐서는 그저그런 유물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깃든 역사적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볼 수 있다는 뜻인데, 풍수원성당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자그만하고 예쁜 성당에 불과한 풍수원성당이 이 땅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87년 이듬해에 대도시가 아닌 강원도 산골짜기에 설립된 데는 이 지역이 모진 박해를 견디고 신앙을 지켜낸 교우촌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다.
이곳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0년대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무렵이다. 박해가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 지역에 살던 40여명의 신자들이 8일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메다 깊은 산골 풍수원에 정착한 것. 화전과 옹기구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80여년간 성직자 없이 신앙을 간직해오던 신자들은 1888년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이곳에 강원도 최초의 본당을 설정하고 르메르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파견함에 따라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된다.
1907년 지금의 성당을 완공한 2대 주임 정규하(1863∼1943년) 신부는 초기 풍수원성당 역사와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정 신부는 김대건·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6년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번째 신부. 사제품을 받은 그 해 풍수원본당에 부임해서 선종할 때까지 무려 47년을 오로지 이곳에서만 사목했던 그는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성당을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본당에서만 무려 50년 가까이 사목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본당이나 사제 수 모두 얼마 안되던 교회 초창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풍수원성당 공사는 전적으로 교우들의 땀과 정성으로 이뤄졌다. 벽돌 쌓는 방법을 몰랐던 탓에 서울 명동성당 건립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을 불러온 것을 제외하고는 남자 신자들이 산에 올라 아름드리 나무를 베고, 성당 아래 200m 떨어진 가마에서 벽돌을 굽는 등 대부분의 일이 신자들 몫이었다. 여자 신자들도 줄줄이 서서 벽돌을 날랐다.
성당 건립 기금은 당시 돈으로 6천원. 강원도 일대 지주와 가난한 신자들이 크고 작은 돈을 내놓았는데, 거금 1500원을 희사한 김말구 할아버지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다.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공사장으로 올라와 "내 돈 내놓으라"고 주정을 했다. 그러면 정 신부는 "말구, 너 이리와! 네 돈 다 가져가라"고 꾸짖었고, 할아버지는 그 때마다 "신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빌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또 돈타령을 했고, 다음날 어김없이 정 신부에게 꾸중을 들었다. 땀흘려 일하던 신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성당을 찾게 되면 한적하기만 한 앞마당에서 100여년 전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한번쯤 떠올려보는 것도 색다른 맛일 게다.
정 신부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을 뿐 아니라 강원도 전교사를 황금기로 이끌었다. 정 신부 사목 당시 주변 12개 군을 관할하며, 신자 수 2000여명에 달하는 전교의 중심으로 성장한 풍수원성당은 이후 춘천·원주교구의 모태가 된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풍수원성당은 요즘 대대적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성당 일대를 세계적 성지순례 코스로 조성하는 바이블 파크(유현문화관광지) 조성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원주교구가 지난해부터 횡성군과 함께 추진 중인 이 사업은 95억여원을 들여 2005년까지 대지 78만평에 6만8천평의 바이블 파크 동산을 조성하는 것으로, 동산에는 수목원과 피정의 집, 미술관, 정규하 신부 동상, 천국동산, 가마터 등이 들어서게 된다.
문제는 원주교구가 분담해야할 비용이 33억원에 이른다는 점. 지난 4월 바이블파크 조성을 위한 '성역화사업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풍수원본당은 묵주기도 100만단 바치기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뜻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후원금(1구좌 100만원)를 모금하는 등 기금 마련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33억원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16대 주임 김승오 신부는 "한국교회사에서 풍수원성당이 차지하는 비중도 비중이지만 이곳처럼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성지도 드물다"면서 바이블 파크 사업에 모든 신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요청했다.
"깊은 산골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유산을 간직한 풍수원성당입니다. 와서 보면 알겠지만 지친 심신을 추스리고 나태해진 신앙을 반성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순례지가 바로 여깁니다. 한국교회 귀중한 유산인 풍수원성당이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바이블 파크 사업에 관심과 협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문의 033-342-0035 후원계좌 농협 305053-51-024738 예금주 : 원주교구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