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체험 살려 '사목센터' 운영…대중치료 전념
“술은 이슬비가 몸을 적시듯 서서히 내 몸을 파괴했고, 결국 영혼까지 무너뜨렸습니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불가능했고 신자들은 나를 피했습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죠. 그 경험이 같은 아픔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 지난 6월 3일 서울 평화방송 별관 단(斷) 중독사목위원회 사무실에서 허근 신부를 만났다. 1999년 10월부터 알코올 사목센터를 운영해 온 그는 도박·약물 중독 상담까지 맡고 있다.
가톨릭 알코올 사목센터 소장 허근(52) 신부. 술의 해악을 알리고 중독에서 빠져나오도록 돕는 게 그의 일이다. 6년 전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까지 그 스스로가 알코올 중독자였다. 앉은 자리에서 소주 8병, 맥주 24병을 보통으로 마셨다. 술을 마시다 미사를 거른 적도 있었고 신자와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허 신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에 ‘허근 신부의 알코올 탈출기’를 2002년 6월부터 연재해 오다 지난 5월 9일 86회로 끝을 냈다. 그는 체험기 ‘나는 알코올 중독자’, 시집 ‘그 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등도 펴냈다.
해병대 근무하면서 술과 ‘인연’
“처음에는 연재를 망설였죠. 가톨릭에 누가 될까 해서요. 자랑도 아니고. 하지만 알코올 중독의 위험을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도 알코올 중독에 빠질 수 있다. 누구든 빠질 수 있다’, 이런 거죠.”
우선 “주(主)보다 주(酒)를 좋아하는 사제도 천당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허 신부는 “결혼을 했더라면 벌써 이혼 당하고도 남을 텐데 하느님과 결혼한 사제가 가정 생활에 소홀하다면 어디가 예쁘다고 천당에 들여주겠냐”며 웃었다.
허 신부는 친가로는 7대, 외가로는 6대가 천주교 신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장남인 허 신부는 두 남동생 모두 신부다.
그는 1980년 2월 사제 서품을 받고 서울 돈암동 성당 보좌신부, 1981년 추기경 비서로 일할 때까지 착실한 성직자였다.
그의 술 인생은 1982년 해병대 군종 신부로 배치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해병대 문화 탓에 술도 물처럼 마시게 됐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술을 좋아해 유전적으로도 술 잘하는 체질을 타고 났다고 했다.
‘한 번 중독은 영원한 중독’이 됐다. 3년 후 제대 때에는 술 없이 못 사는 상태가 됐다. 서울 상계동·면목동·난곡 성당 주임 신부를 거치면서 주량은 늘어갔다. 술 좋아하는 신자와 대작하다보면 소주 50잔을 넘겼다.
“언제부턴가 해장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새벽 미사 후 해장국 먹다 술을 마셨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밖을 보니 해가 있더라고요. ‘해가 떴네요’ 하자 옆의 신자가 ‘지는 해예요’라고 했어요. 하루 종일 마셨던 거죠.”
술버릇도 나빠졌다. 술자리에서 신자와 싸우기도 했고 길에서 잠이 들기도 했으며 새벽 미사도 여러 번 빠졌다. 그는 사람들을 피하게 됐다. 전날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어떤 실수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상태였다.
성직자도 술에 빠질 수 있어
몸도 망가져 정상체중보다 12㎏ 모자라는 46㎏이 됐다. 간과 위도 상했다. 그는 “육체보다 영혼의 상처가 더 아팠다”고 했다. 자신의 신앙은 물론 신자들의 신앙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자책감이 컸다.
“신부는 의지력이 일반인하고 다를 텐데 어떻게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 있냐고요? 그건 성직자는 암에 걸리지 말라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알코올 중독을 ‘병’이라는 차원에서 봐야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정신력이 약하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1998년 초 서울대교구 김옥균 주교가 간절한 충고를 했다. 그는 그해 3월 광주 성요한병원으로 들어갔다. 그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한다.
병원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하루 30분밖에 햇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비가 오면 아예 볼 수가 없었죠.”
처음 2주간은 환청이 들렸다. 뒤에서 누군가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그럴수록 기도에 매달렸다. 그렇게 한두 달 후 금단 현상이 사라지고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넉 달 동안의 입원 치료를 끝내고 11월까지 통원치료를 받았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의 패배감은 사라지고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소명을 맡기기 위해 만드신 시험대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허 신부는 알코올 중독자 사목 활동을 하겠다고 지원했고 뜻이 받아들여져 알코올 사목센터가 문을 열었다.
중독자 시절 본당에 특강을 하러 가자 신자들도 따뜻하게 신부를 맞았다. 누구보다 어머니가 기뻐했다. “재작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술을 끊지 않았더라면 한(恨)이 됐겠죠.”
지난해 2월 상담센터를 찾아온 30대 여성이 상담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간암으로 숨져 장례미사를 집전했을 때는 할 일을 다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보람도 많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센터를 찾은 중독자가 있었는데 허 신부를 보자 “술 취해서 우리 할머니 장례미사 드렸던 신부 아니냐. 돌아가신 할머니가 천당에 갈 수 있었겠냐”고 말했다고 한다. 허 신부는 “그 때 당신은 건강했고 나는 중독자였지만 지금 나는 건강하고 당신은 중독자가 됐다”며 그를 설득했다. 별거상태였던 그는 치료를 받은 지 몇 달 후 허 신부에게 “오늘 따뜻한 밥 먹었어요”라며 웃었다. 별거를 끝낸 것이었다.
이혼 위기까지 간 일류대 출신의 대기업 임원이 있었는데 성당에서 허 신부 얘기를 들은 초등학생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지막 소원”이라며 허 신부 만나기를 간청했고, 결국 그 가정은 깨지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을 벗어나는 첫 걸음은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치료를 받아야죠.”
허 신부는 무엇보다 가족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가족마저 포기하면 알코올 중독자는 끝내 치료받을 수 없다는 것.
“당장 술을 끊겠다고 목표를 세워서는 안됩니다. ‘오늘 하루는 폭음하지 않는다’ ‘오늘은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부터 시작해야죠.”
허 신부는 지금도 일어나서 처음 하는 기도가 ‘오늘 하루 술 없이 지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다. 그는 술은 한 방울도 입에 안 댄다고 했다. 주교 허락을 얻어 미사 때도 축송만 하고 포도주는 마시지 않는다. ‘한 잔’은 곧바로 알코올 중독으로 빠져든다.
무엇보다 가족의 역할이 중요해
“알코올 탈출기를 연재하면서 어두웠던 옛날을 돌이켜 보는 게 힘겨웠지만 나약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는 동시에 내 자신의 단주생활을 위한 결심을 다지는 기회가 됐습니다.”
“술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게 문제죠. 술을 강제로 권하는 잘못된 음주 문화도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하겠죠.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체계적 프로그램도 빨리 마련돼야겠고요.”
그의 시집 제목처럼 ‘그 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떻게 됐을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게 사제가 된 이유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니까 처음 목표대로 된 거죠.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글쎄요. 술을 끊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서울역 지하도에 있을 텐데.”
김승범 주간조선 기자(sbkim@chosun.com)
이 글은 청소년들과 아직도 술을 즐기며 알코올 중독자가 된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허 신부님의 애절한 알코올 탈출기를 읽고 변화 받는 사람이 많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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