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서울대교구

[서울]당고개

알타반 2005. 3. 1. 21:36

 

[서울] 당고개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신계동 1-57
지리좌표
    
순교 현양탑 앞 북위 37°32′08″ 동경 126°58′02″
문 의 처
    
삼각지 성당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2가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 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성모상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 걸식으로 묵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된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린다. 그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히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메고 희광이를 찾는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 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이에 감동한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을 이용, 신용산역에서 하차하여 용산 전자 상가를 지나 10여분 정도 걸어야 된다. 삼각지역에서 내려서 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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