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과 공소/수원교구

[수원]양평 양근성지

알타반 2005. 3. 1. 10:44
[성지순례] 수원교구 양평 양근성지 - 복음의 씨앗 처음 뿌려진 '한국교회 요람'
794 호
발행일 : 2004-10-24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의 행렬, 가슴을 죄어오는 삶의 경쟁, '빨리 빨리' 패스트 푸드, 빛을 덮은 빌딩들, 탁한 공기….

떠나자. 평일에도 차가 꽉꽉 들어선 서울 시내. 하지만 1시간만 벗어나면 어머니 품처럼 푸근한 '신앙의 요람'에 안길 수 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팔당대교를 지나 얼마나 달렸을까. 서울에서 출발한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 양평읍내를 목전에 두고 입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성지'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도 적다.

사람 한 명 없는 너른 성지 마당에 섰다. 푸른 강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강에서 부서지고 있다. 그 찬란함 사이로 편안한 가을 공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성지 주변을 감싼 은은한 물안개에선 신비감마저 돌았다. 친구와 함께 조용히 얘기하며 차를 마셨으면 좋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 충동은 '들뜬' 행복이 아니라 조용함, 고요함 속에서의 충동이었다. 어쩌면 순교자들의 영광을 간직한 땅을 딛고 서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국교회 최초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 수많은 순교자들이 던져진 강. 한국교회 창설 주역인 권철신, 권일신,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권상문, 조숙ㆍ권데레사 동정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혹은 순교한 곳. 한국교회 창립 주역들이 2년간 가성직제도 하에서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한 곳. 이존창ㆍ유항검 등도 모두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을 배우고 익혀 전국 각지에 신앙을 전파했다고 한다.

"형제님은 지금 한국교회의 맨 처음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성지 전담 권일수 신부가 반갑게 맞았다. 권 신부를 보자마자 이처럼 한국교회사 첫 머리를 장식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양근성지가 왜 아직까지 유명세(?)를 타지 않고 '잊혀진 땅'으로 남았는지를 물었다. 권 신부는 대답이 없었다.

실제로 양근성지는 한반도에 신앙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땅이라는 점에서 학계에선 오래전부터 주목해 왔다.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도 최근 미사 강론 등 각종 모임을 통해 한국교회가 시작된 양근성지를 '한국교회의 요람'이라고 지칭하며, 그 중요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양근성지에는 십자가와 성모상만 덜렁 있을 뿐, 제대로된 성당 하나 갖추지 못하고 있다. 매일 오전 11시에 봉헌되는 미사는 비닐하우스에서 이뤄진다. 성지 사무실도 없어 컨테이너를 임시로 쓰고 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순례객은 평균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앙 후손들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해낼 겁니다. 전국 신자들이 한국교회의 첫 자리에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권 신부는 순교자들의 과거에서 미래를 끄집어 냈다. 권 신부는 '수상 성지순례 파크 조성' '영성센터(가족단위 묵상공간) 건립' '초기교회 신앙촌 재현' 등을 통해 신앙인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영적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양근성지는 인근에 남한강과 유명산을 비롯해 스키장, 콘도 등 다양한 휴양지가 있어, 신앙인들이 영적, 육체적 휴식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권 신부는 신앙인들에게 영적 행복을 육체적 휴식과 함께 제공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권 신부와 3시간 넘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성지엔 한명도 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신앙 후손들의 무관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조들의 땀과 피를 담았던 강물은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강변엔 키가 허리까지 자란 갈대로 무성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했지만, 직접 발걸음을 옮겼다.

옷깃을 여미고, 한참동안 갈대숲 속을 걸었다.

성지순례 및 후원 문의: 031-775-3357, 031-772-7006

<한국교회 첫자리 양근성지>

조선시대 남인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은 1777년 고향 양근(지금의 양평 양근성지) 가까운 곳에 있는 천진암ㆍ주어사에서 강학(講學)을 주도한다.

통역관 김범우(토마스, ?~1786) 집에서 열린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자리) 집회가 1784년 가을 시작됐으니까, 7년 앞서 양근에서 이미 초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권철신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및 주문모 신부 등과 함께 국문(鞠問)을 받았고 마침내는 매를 맞아 66살에옥사한다.

그래서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일찍이 천진암은 한국교회 발상지, 양근성지는 한국교회 요람이라고 정리했다.

양근은 또 권철신 등의 주문에 의해 주문모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바오로)과 그 동생 윤유오(야고보),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 유한숙,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권일신의 아들), 조숙ㆍ권 데레사(권일신의 딸) 동정 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살다가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이중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윤운혜 등은 현재 시복 추진 중인 분들이다. 또한 성녀 조증이(바르바라)도 양근 출신이다.

<양근성지 인근 교회 성지 및 유적지>

▲천진암 주어사 : 권철신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 학자들이 강학회를 열던 곳으로 후일 이 모임을 통해 천주학이 연구되고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권철신 권일신 등이 살던 곳이 바로 양근으로, 이들은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집이 아닌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가졌다.

▲한감개, 대감마을 : 한감개는 한국교회 창설의 주역을 담당했던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의 고향. 그리고 최초의 밀사요 권씨 형제의 제자인 윤유일의 집안이 거주했던 마을이다. 또한 이곳에서 가성직 제도가 시행됐다. 아울러 이곳은 충청도 내포 사도 이존창과 전라도 사도 유항검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능말 : 순교자 조동섬 유스티노와 조삼덕 토마스가 태어난 곳.

▲양근리(관문골) : 많은 순교자들이 형벌을 받다가 옥사한 곳.

▲남한강변 순교터 : 양근 고을에서 체포된 초대교회 신앙인중 많은 수가 남한강변에서 참수를 당했다.

▲마재 :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의 고향.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딸 정정혜 엘리사벳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분원 : 장약종이 주교요지를 저술하고, 또 체포된 곳. 1791년 진산사건(윤지충 권상연 등이 조상제사 거부로 순교한 사건) 이후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가 친척들의 권유로 천주교를 버리자 정약종은 이곳으로 와서 주교요지를 저술했다.

▲동막골 : 1800년 4월25일 양근에서 순교한 유한숙의 고향.

▲용문산 용문사 : 권철신은 조동섬 등과 함께 이곳에서 8일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신심 수련에 전념했다고 한다.

우광호 기자   kwangho@pbc.co.kr

(사진설명)
1. 권일수 양근성지 전담 신부가 불모지로 내버려져 있는 한국교회 최초의 신앙공동체 형성지, 양근성지를 가리키며 신앙인들의 관심을 요청하고 있다. 사진=변대원 명예기자bendw@pbc.co.kr          2. 남한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양근성지 전경.                 3. 양근성지에서 유일한 조형물인 십자가상. 예수님은 성지와 순교자들이 스러져간 남한강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4. 찾아가는 길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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