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성당이 명실상부한 선교의 거점으로, 그리고 인천 지역의 명물로 떠오른 것은 1904년부터 1937년까지 무려
33년간이나 주임신부로 활동했던 제4대 드뇌 신부 때부터다.
1899년부터 본당에 거주하면서 제3대 주임 마라발 신부를 도와
사목을 함께 했던 터라 본당과 인천지역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던 드뇌 신부는 그야말로 ‘준비된’ 주임 신부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부지 침입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1910년까지 새말(현 시흥시 소래읍)·고잔(김포시 검단면)·구월리·부평
등에 공소를 신설하는 한편 같은 해에 영종도 공소 경당을 축성했다.
드뇌 신부는 또 1909년에는 신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마라발 신부가 1900년에 설립한 박문학교의 교장을 맡아 학교 운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문학교는 1910년 여자부 신설,
1914년 교사 신축, 1917년 남·녀부 통합 및 ‘인천박문학교’로 개칭 등의 과정을 거쳐 인천의 명문 사립학교로 자리잡는다. 그는 이밖에도
1915년에 바오로 성인을 본당 주보 성인으로 정하고 1933년에는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는 성당 증축 공사에 나서는 등 답동성당의 토대를
쌓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답동성당은 제5대 임종국(1937∼1958년 재임) 신부에 와서야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신부를 맞게
된다. 임신부는 20여년간 재임하는 동안 8·15해방과 한국전쟁 같은 엄청난 사건들을 겪으며 본당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8년 부녀회원들로 구성된 ‘소화 데레사회’를 조직하고 회장단과 복사단을 정식으로 구성한 것은 물론 성모회의 활동을 활성화하는 등
평신도 단체 설립에 앞장서온 임 신부의 노고에 힘입어 답동성당은 1940년대초 신자수가 3천여명에 달할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답동성당은 1958년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로부터 분리돼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이 지역의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제6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버크(1958∼1963년 재임,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는 영흥·선재·풍도·이작도 공소를 설립하고 60년에 도화동·해안동본당을, 62년에 화수동본당을 분가시키며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1961년 6월 교황 요한 23세가 ‘인천 감목 대리구’를 ‘인천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구장에 나길모 주교를 임명함에
따라 답동성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나 주교는 이후 무려 41년간 재직한 후 올해 4월 교구장직을 최기산 주교에게 넘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답동성당은 제7대 설리반 신부에 이어 1968년 제8대 강의선 신부가 부임하면서부터는 한국인 신부가 주임을 맡아왔다.
특히 10대 김병상(1975∼1980년 재임) 신부 때부터는 평신도 활동의 확대, 시국 기도회와 민주화 운동, 이웃 돕기 활동 등을 통해 본당의
활성화는 물론 사회와 함께 하는 본당상을 구현하는 데 많은 앞장서고 있다. 또 13대 강용운(1986∼1992년 재임) 신부 때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답동대성당 100년사」를 발간하고,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했다.
1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인천시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항도 인천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온 답동성당. 그러나 오랜 세월 탓일까. 과거 인천의 중심지였던 답동지역이 탈 도심화의 바람 속에서
예전의 위세만 못하다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난해 1월에 부임한 제16대 이학노 주임신부는
“답동성당은 인근 지역을 관할하는 하나의 본당이기에 앞서 인천교구를 대표하는 인천시민의 성당”이라면서 “본당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선교에
주력하는 한편 인천시민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휴식 공간이 되게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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