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카지도 도시를 들어서니 입구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베네딕또성인의 도시이자 평화를 위한 도시이다'
그런데 그만 그 평화로움이 잠시 후 사라졌지 뭡니까.
굽이굽이 돌아 정상까지 오르는 길목을 내려다보니 아찔! 한데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저로서는 안그래도 무서운데 우박과 함께 비가 얼마나 무섭게 쏟아지는지...
맘속으로 얼나마 기도했는지 몰라요. 무사히 다녀오게 해주십사고....
그곳은 지중해를 끼고 있어 그렇게 예고도 없는 비,바람이 많다네요.
그러데 정상에 오르니 비가 그쳐서 돌아올 때는 맑은 하늘 보며 왔답니다.
![]() 수도원 조감도 ...액자 속의 그림을 찍은 거라서... 상당히 큽니다.
![]() 전체를 다 담기는 힘들고...
![]()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아래 사진의 모습이 되지요.
![]() ![]() ![]() 저 분수가 예전에는 우물이 있던 곳..천국의 물 또는 생명수라고 했다고...
![]() 베네딕토성인 돌아가실 때 두팔을 벌리고 제자들과 기도하시던 성인의 마지막 모습
![]() 베네딕또(분도)상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는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Umbria) 지방의 누르시아(Nursia)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로마(Rome)에서
수학하였으나 도시생활의 혼란과 방종이 그로 하여금 광야로 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500년경에
그는 그곳에서 30마일 떨어진 엔피데로 갔다가 은수자의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수비아코
(Subiaco)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3년 동안을 동굴에서 살았는데, 로마누스(Romanus)라는 은수자에 의하여 음식을 공급받았다. 독수자가 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덕과 엄격함이 널리 알려
져서, 그는 비코바로(Vicovaro)에 있는 한 수도자의 공동체로부터 그들의 원장이 되어달라는 요청
을 받고 이를 수락하였으나, 그들이 그의 엄격한 규칙에 반대하여 마침내 그를 독살하려고 시도하
자 수비아코로 되돌아왔다. 그 후 곧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원장의 지
도하에 있는 12개의 수도원을 조직하고 일과표의 일부로서 노동을 실시하였다. 수비아코는 영성과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인근의 사제이던 플로렌티우스가 자신의 활동을 트집 잡자, 갑자기 그곳을 떠나 525년경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폴로에게 헌정된 이방인 신전을 파괴하고
인근의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530년경에는 서방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는 수도원
을 건립하였다. 그의 성덕과 지혜 그리고 기적에 대한 명성이 수없이 퍼져나가 또다시 많은 제자들
이 몰려왔다.
그는 수도자들을 단일 수도원 공동체로 조직하고, 상식을 존중하면서도 올바른 금욕생활, 기도, 공부 그리고 일 및 한 명의 원장 아래 있는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저 유명한 규칙을 썼다. 이 규
칙은 순종과 정주 그리고 신심을 강조하였으며,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도자들
을 지도하면서도 통치자와 교황의 고문을 담당하였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도틸라의 침공으로 황
폐해진 롬바르디아(Lombardia)를 재건하는데 정열을 쏟았다.
그는 547년경 3월 21일 몬테카시노에서 운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 베네딕투스는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문
장은 깨어진 컵, 까마귀, 종, 아바스 문장 그리고 숲이다.
![]() 스콜라스티카성녀상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어릴 때부터 하
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 왔으나 아마도 부모의 집에서 기거한 듯 보인다. 그 후 그녀는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혼자인지 아니면 공동체 생활을 했는지
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당시에 그녀는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성 베네딕투스를 만난 것 같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
화집” 33장에 의하면,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Piumarola)에 베네딕도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
스티카에게 맡겼다. 그로 인해 성녀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화집" 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 온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 지막으로 성 베네딕투스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베
네딕투스 성인이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는 오빠에게 다음날 아
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베네딕투스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성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를 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네딕투스 성인과 수사
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당신은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주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
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운명하였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동 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몬테
카시노가 붕괴된 후 8세기경에 베네딕투스 성인의 유해와 성녀의 유해는 플뢰리(Fleury) 수도원으
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탈리아 밖의 지역에서 성녀의 공경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전례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전세계의 교회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1-13
세기에 이르러서였지만,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
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성녀로 공경받고 있다.
![]() ![]() ![]() ![]() ![]() 천정 대단하죠?
![]() 소성당에서 저희일행이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 ![]() 이 모든 것이 그림이 아니라 모자이크...감탄!
![]() ![]() 예수님과 쌍둥이 오두이...
![]() 베네딕도성인
유리에 반사되는 것을 피하려고 옆에서 찍었더니 비스듬하죠.
![]() 동생 스콜라스티카성녀
![]() 무슨 돌인지...잘 모르겠네요.
무슨 형상을 하고 있긴 한데...
이곳에서 부터 수도원의 역사가 담긴 발물관입니다.
![]() 그레고리안성가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나... 그 처음에 만들어진 성가집....그레고리성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안성가라 한다죠.
그레고리오성인은 첨으로 수도자로서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았으며,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하에 두었다고...
이래서 베네딕도수도원과 관련이 있나봅니다.
![]() 그당시 교황님 쓰시던 모자라하나요. 아래 설명이....
![]() ![]() ![]() ![]() 이제 로마로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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