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인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주임 박재만 신부)은 시내 중심지에 위치해 시민들에게도
친숙하다. 신도시의 발전으로 이제는 이 지역이 구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시민들과 함께 하는 장소로 대전 지역 천주교의 대표성을 지닌 것은
변함 없다.
1962년 성당 건물을 완공할 당시 대전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화제가 됐던 대흥동성당은
60년대를 지나 70년대까지만 해도 시내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건물이었다.
특히 당시 교회 건축물들이 고딕 양식의 적벽돌 구조가
주를 이루던 것과는 달리 시멘트 벽돌을 사용해 마감하고 현대적 디자인으로 기존의 개념을 탈피한 것이 대흥동성당 건물의 특징이다.
당시 거대한 성당 내부에 기둥 하나 없이 건축한 것은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모으고 있는 형상의 성당건물은 고딕 양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다.
대흥동성당이 중구 대흥동 189번지 현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1945년 10월7일이다. 이 자리는 1937년 대전에 진출한 작은형제회가 유치원을 운영하던 곳이었다. 1944년 목동에 위치한
‘대전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오기선 신부는 해방 후 시내에 가까운 이곳으로 본당을 옮기고 목동에 있던 성당은 프란치스코수도회(현 작은 형제회)에
맡겼다.
대흥동성당은 처음에는 유치원 목조 건물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6·25때 피난민들의 임시 수용소로도 사용했던 이
강당은 그러나 6·25를 거치며 폭격을 맞아 잿더미로 변해버려 1952년 12월 87평 규모의 임시 성당을 건축했다.
하지만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성탄이나 부활 때는 장소를 시청, 도청 강당 등으로 옮겨 대축일 미사를 봉헌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대전교구가
감목대리구로 설정된 지 10년만인 1958년 대목구로 정식 설정되면서 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기에는 이 임시 성당이 너무 비좁아 오 신부는
당시 대목구장 원형근 라리보 주교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대성당 건립을 결정했다.
1960년 성당 건축기공식을 갖고 기초공사를 겨우
마쳤을 때 시공업자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그래서 이 공사는 없던 일로 하고 다른 건축업자와 새로 계약을 해 1962년 3월 10일 다시
기공식을 가졌다.
공사 중에 서울의 노기남 대주교가 대전에 내려왔다. “도대체 성당을 얼마나 크게 짓느냐”는 노 주교의 말에 오
신부는 “명동대성당보다 더 큰, 한국에서 제일 큰 성당을 짓는다”고 자랑했다.
명동성당 건축규모는 길이 68m, 폭 29m,
종탑높이 47m, 연면적 612평이다. 그런데 오 신부는 명동성당 규모를 423평으로 계산해 대흥동성당 규모는 이보다 100평이 더 넓다고
보았다. 오 신부의 저서 「순교자들의 요람을 찾아서」에는 대흥동성당 건축 규모가 길이 273척(82m), 폭 73척(22m), 종탑높이
130척(40m), 연면적 524평으로 나와 있다.
성당 설계는 이창근(돈보스코)씨가 맡아 설계도와 투시도를 로마 인류복음화성에도
보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거대한 성당 내부에 기둥하나 없이 건축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어서 이런 건축을 처음 해본 설계자와 같이 현장감독을
한 오 신부는 노심초사하며 기도했다.
무사히 이 공사 과정을 마치자 오 신부는 성당 위 아래층을 오르내리며 “됐다, 됐다”를
외쳤다.
그러나 큰 공사에는 말이 많은 법이다. 사제들은 “요것은 요렇게 했으면…저것은 저렇게…”하면서 입을 댔다. 오 신부는
참다 못해 “성당을 망쳐도 내가 망치고 제대로 지어도 내가 할 테니 자아, 그만들 두시지. 이거 사람 미치기 똑 알맞습니다. 그만들
하시라구요.”(오 신부의 「순교자들의 요람을 찾아서」) 하면서 딱 잘라버렸지만 그래도 잔소리는 계속됐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높이 올라간 종탑을
보러 온 구경꾼들은 현기증이 난다며 한마디씩 했다.
드디어 공사 9개월만인 1962년 12월30일 성당이 완공됐다. 완공에 앞서
새 성당에서 봉헌된 24일 성탄 자정 미사에는 3500명이나 참례했다. 유도순(루가)씨 부부가 기증해 프랑스에서 주문해온 세개의 종이 내는 도,
미, 솔의 아름다운 화음이 지역 사회에 울려 퍼져 나갔다.
성당 봉헌식은 1963년 5월1일 전국에서 모인 사제 200여명과
수도자 150명을 비롯해 신자, 지역민 등 400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이연숙
기자 mirinae@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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