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제2 강연
제 2 강의
사막 교부들의 생각과 정서들을 다루는 길.
생각과 느낌들과의 대화
시작하는 말
초기 수도자들의 아버지에게 영적 삶의 주요 부분은 욕망들을 조화롭게 다루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했다.
1. 안티르헤티콘적 방법(antirrhetische - 에바그리우스가 저술한 책 - Methode)
에바그리우스는 Prakikos에서 안티르헤티콘적 방법을 서술했다.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악마들을 구분하는 것을 배워서 그들이 등장할 때 동반하는 현상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여 적절히 대처해야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욕망들을 잘 구별하여 각 욕망에 맞는 적절한 말로써 대항하며 욕망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러한 방법들을 자신의 저서 안테르헤티콘에 상세히 서술해놓았다. 그는 먼저 악마가 수도자를 수도생활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기 위해 유혹하는 말들을 소개하고 이것을 물리칠 수 있는 말들을 성경에서 찾아냈다.
우리의 욕망들과 감정들은 언제나 생각을 통해 표현된다. 우리 모두는 두려움도 믿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시편 118을 인용하여 나의 두려움에 대처해 나가면 이미 내 안에 있는 믿음과 접하게 된다. 그러면 이 믿음이 점차 더 강하게 된다.
생각은 우리를 병들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다. 치유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언제나 떠오른ㄴ 부정적인 생각들을 인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성경에서 적절한 말을 찾아내어 자주 반복하고 숙지함으로써 나의 정신에 깊이 새겨들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에바그리우스는 성경을 치유의 책으로 활용한다. 성경의 말씀은 치유의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 안에 있는 치유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작용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2. 생각들과의 대화
생각과 느낌들과 대화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생각과 욕구들을 자세히 알아내어 나의 영적 길에 종합해내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생각들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나가느냐이다.
욕구들이 찾아오면 억압할 것이 아니라 들어오도록 허락하여 그들이 지닌 힘을 우리의 삶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은 그 사람 때문에 나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이다. 이 때 화와 대화를 잘하여 화가 지닌 에너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화는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변화된다.
내 안에 일어나는 생각들과 느낌들을 몰아낼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각 정서들과 욕구들이 지닌 긍정적인 힘을 발견하게 된다.
개가 짓는 곳에는 보물이 묻혀 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동화는 노트필기에서 자세히 들려줄 것이다.) 보물은 참된 자아에 관한 표상이다. 나의 화는 내가 참된 자아를 소홀히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지도 모른다. 성욕이 나의 주된 문제라면 그것은 내가 나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의 주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자아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참된 자아를 만날 때에만 비로소 내적 평화를 누릴 수 있다.
3. 비 동질화
초인격적 심리학에서 로베르토 아사지올리는 비동질화(Dis-Identifikation)의 개념을 제기했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화를 관찰한다. 그러면 관찰하는 그 순간은 화로부터 물들지 않는다. 나는 화를 지니고 있지만, 내가 화 자체는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지만 내가 두려움 자체는 아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화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상대화시킬 수는 있다. 화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나의 내명에 있다. 이곳에서 참된 나를 만날 수 있고 나 자신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의해,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의해 규정될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4. 싸울 것인가 평화를 맺을 것인가
에바그리우스는 언제나 악마와의 싸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를 거슬러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욕망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잘 다루어서 그들 안에 들어 있는 힘을 나의 영적 삶을 우해 활용하는 것이 관건이다. 욕망들을 억압하는 사람은 결국 그들에 의해 지배되고 만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사랑과 공격성, 이해와 감정, 통제와 통제불능, 질서와 무질서, 한쪽만 존중하면서 살아가면 다른 쪽이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파괴적인 작용을 한다. 어두운 부분과 화해하여 배려해야 한다. 어두움 속에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힘이 있다.
5. 방 안에 머물기
에바그리우스는 특정한 욕망들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방법들을 서술해놓았다. 예를 들어 독서, 밤에 깨어 있기, 기도는 내적 불안정을 극복하는 데에 좋은 방법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먼저 주된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것을 권한다. 그 다음에 그 욕망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사용하라고 한다. 영성은 언제나 치유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욕망을 다스리는 최종 목적지는 평정(apatheia)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평정을 영혼의 건강이라 했다. 하느님과의 만남,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을 통하여 사람은 영혼의 건강을 지녀야 한다.
이를 위해 수도자들의 아버지들이 공통적으로 권하는 길 중 하나는 방 안에 머물기이다. 수도자는 방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서 유혹을 제대로 바라본다. 유혹 안에 들어 있는 깊은 동기를 파악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 있었던 특정한 유혹들이 본인에게 남겨 놓은 상처들을 발견한다.
교부들의 금언 중에는 내적으로 진보하기 위한, 자신을 좀 더 잘 알기 위한, 욕망들을 잘 극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방 안에 머물기를 언급한 것이 대단히 많다. 방 안에 머물러 인내심을 지니고 앉아 있는 행동 자체가 수도자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고유한 길을 알려준다.
물론 수도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종종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성취한 것에서 찾지 않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방 안에 있으면 하느님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인지 알게 된다.
마치는 말
수도자들은 우리가 욕망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려주는 여러 가지 길들을 개발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욕망들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힘들이다. 욕망들이 없다면 수도자의 삶은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욕망들은 또한 수도자를 지배할 수 있다. 영적 길의 중요한 부분은 욕망들을 잘 다스리는 것에 성립한다.
수도자의 이러한 길을 아래로부터의 영성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위로부터의 영성은 수도자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상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길은 당연히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위로 상승하게 하는 이상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 이상들과 강하게 동일화하여 우리의 실제 모습이 지니고 있는 어두운 부분을 억압할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든 이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분열될 수 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는 병들고 만다.
욕망들을 다스리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한 부분이다. 감정과 욕망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한다. 수도자는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하는 다섯 가지 장소를 알고 있다. 생각과 느낌, 꿈, 육체, 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 다섯 영역들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좋은 방법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위에 있다. 그는 하느님의 진면목을 만날 것이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