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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제5강의

알타반 2008. 1. 17. 17:49
 

제5강의

치유의 길로서의 관상


시작하는 말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 있어서 Askese(자기 수련)는 정화의 길이다. 욕망들을 다스리는 것, 단식, 기도, 깨어있기 그 외 여러 가지 자기 수련적인 훈련들은 영혼의 힘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고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Askese 만으로는 영혼을 온전히 치유해낼 수 없다. Askese에다가 관상을 보충해야 한다.


1. 관상의 본질


에바그리우스는 소책자 <기도에 대하여>에서 관상에 관한 이론을 전개해놓았다. 그는 이 책을 153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153마리의 물고기를 지칭하는데 사람의 변화를 상징한다.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요소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로 일치하게 된다. 그러면 내적 상처들은 치유된다.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라고 서술하는 것은 모두 관상을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모든 덕목 중에서도 가장 신적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정신은 본성적으로 기도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모든 Askese와 모든 그리스도를 따름의 목표는 기도이다. 기도 안에서 사람의 정신은 온전히 하느님을 향한다. 에바그리우스는 기도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실현되는 것으로 본다. 기도는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이고 선물이다.


기도는 사람을 자신의 본성을 넘어서도록 만든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천사들과 같다.”(기도 113) 관상을 통해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이 된다. 하느님 자신이 그 사람 안에 사신다. 그런데 사람의 정신이 하느님과 하나로 일치하는 순수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아파테이아의 상태, 깊은 고요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러한 상태를 완전한 사랑이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순수한 기도에서 성장하는 관상은 수도자를 깊은 기쁨으로 채운다. 우리가 기쁨으로 가득할 때 참된 기도를 드리게 된다. 기도할 때에 깨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도는 너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든다. 기도를 통해 비로소 너의 온전한 가치를 발견한다. 기도는 특히 하느님께 대한 너의 사랑을 심화한다.”(기도, 밤베르거, 도입 84)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기도 안에서 더 이상 분심에 시달리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기도 안에서 모든 표상들과 생각들을 털어 내버려야 함을 말한다.


2. 관상의 치유적인 효과


관상에는 두 가지 치유적인 효과가 있다. 치유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길은 관상을 할 때에 언제나 다시 떠오르는 생각들과 감정들, 욕망들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불편함을 거슬러 싸우지 말고 지나가도록 두는 것이다. 생각들을 구름처럼 지나가도록 두는 것이다. 바다의 표면은 파도들이 일지만 바다 속은 고요하다. 관상을 하는 중에 하느님 안에서 나의 깊은 바닥을 인지한다면 나는 더 이상 외적 폭풍들의 침해를 입지 않게 된다.


두 번째 길은 고요한 내면의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공간이 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온갖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우리를 다치게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건강하고 본래적이며 다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우리 안에 거룩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건강하고 온전하다. 우리가 지닌 깨지기 쉬운 것들 한가운데서 우리는 관상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이 거룩한 핵심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질병을 상대화 시킨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고요한 내면의 공간을 “하느님의 장소”라고 불렀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공간은 모든 욕망을 극복한 지성의 상태로서 이제 자신의 고유한 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영적 길의 목표는 평화가 있는 이러한 내면의 공간이다. 이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화해한다.


에바그리우스는 관상 안에서 자신의 참된 본질을 발견하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칭찬했다. 관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에만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눈을 뜨게 한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이것은 참되고 건강한 관상이라는 표시이다.

출처 : 숭고한 憂愁(die erhabene Schwermut)
글쓴이 : 종달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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