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해외성지

[이스라엘]갈릴래아

알타반 2008. 1. 15. 16:14

 

"'생명의 땅' 갈릴래아 지방 "

예수 발자취 생생한 주요 전도무대


▲갈릴래아 호수는 이스라엘 생명의 젖줄이다. 갈릴래아 호숫물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온 것으로 요르단 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예수님의 배`로 불리는 갈릴래아 호수 유람선상에서 국기 게양식을 행하고 있는 순례자들. ▲갈릴래아 호수 지류인 요르단 강.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장소로 추정되는 세례터에는 매일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세례 예식을 갖고 있다.<「성지 이스라엘」 중에서>

 나자렛에서 77번 도로로 북동쪽으로 약 30여km를 가면, '생명의 땅' 갈릴래아 지방이 나온다.

 1세기 유다계 로마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갈릴래아 지방의 경계를 서쪽으로 아코와 가르멜 산, 남쪽으로 사마리아와 베트셰안, 동쪽으로 요르단, 북쪽으로 비카 지역 일대라고 기록했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 인근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갈릴래아라는 지명은 호수가 하프 모양의 유다인 전통 악기 '키네레트'를 닮았다해서 구약시대 때부터 유다인들 사이에 "얌 키네레트"라 불리고 있는 데서 유래됐다.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마을은 예수 시대 때 204개나 됐다. 1세기 당시 가장 작은 마을도 1500여명의 주민이 있었다 하니 예수 시대 갈릴래아 지방에는 대략 30여만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주요 활동지로 성경을 통해 잘 알려진 카파르나움이나, 베싸이다, 겐네사렛, 티베리아스, 막달라, 타브가와 같은 어촌 마을과 산중에 있는 코라진과 쿠르시 등이 바로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던 마을이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갈릴래아 지방은 원래 가나안 사람들 땅이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뒤 즈불룬ㆍ아세르ㆍ납탈리 지파 유다인들이 가나안인들과 갈릴래아에서 어울려 살았다(판관 1,30-33). 이후 단 지파 유다인들도 갈릴래아에 정착했다.

 휴경지가 없을 만큼 비옥한 갈릴래아 지방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로마 등 열강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이유로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의 갈릴래아'(이사 8,13-9,1; 마태 4,15)라며 멸시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UN)은 갈릴래아 지방을 신생국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국가 땅으로 나눌 계획이었으나 1948년부터 2년에 걸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와의 전쟁 후 갈릴래아 지방 전역이 이스라엘로 넘어갔다.

 라틴말로 '갈릴래아', 영어로 '갈릴리', 히브리말로 '키네레트'로 불리는 갈릴래아 호수는 복음서에서도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마르코(1,16;3,7)와 마태오(4,18;14,25) 는 '갈릴래아 바다'라고 하고, 루카는 '겐네사렛 호수'(5,1), 요한은 '갈릴래아 바다'와 '티베리아스 바다'(6,1)를 혼용해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말을 그리스말로 옮기는 데서 파생한 혼선 탓이다. 히브리말은 바다와 호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지중해 해수면보다 약 212m 낮은 갈릴래아 호수는 사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길이(남북)21km, 폭(동서)12km, 둘레 52km, 넓이 170㎢, 깊이 49m. 저절로 '와~'하고 탄성을 터뜨릴만큼 장관이다.

 풍광도 수려하다. 3~4월이면 야생 양귀비가 나른한 봄 햇살을 받아 호숫가를 주홍색 꽃빛으로 물들이고, 한 여름에는 대추야자나무와 수초들이 아기 볼살같은 초록의 싱그러움을 뽐낸다. 가을에는 황금 갈대의 고고함과 겨울에는 북풍의 성난 파고를 잠재우는 아침 저녁 햇살의 넉넉함이 순례자들을 여유롭게 한다. 갈릴래아 호숫물은 헤르몬 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들어온 것으로 요르단 강을 따라 사해로 흘러들어간다.

 갈릴래아 호수는 평화로운 주변 풍광과 달리 무척 변덕스럽다. 한낮에는 잔잔하다가도 일교차가 심한 날이나 기온이 내려가는 일몰 때는 풍랑이 거세진다. 호수 북동쪽에 자리잡은 골란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펜현상을 일으켜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듯한 큰 파도를 만들어 낸다. 지난 1992년 3월에는 높이 3m의 파도가 갈릴래아 호수 서안 티베리아스를 덮쳐 큰 피해를 입힌 바 있다.

 예수께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가르침과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에서 행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랬듯이 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해 갈릴래아 호숫가를 두루 다녔다. 예수께서는 그러던 중 배에서 풍랑을 가라앉히고(마태 8,23-27; 마르 4,35-41; 루카 8,22-25), 배에 올라 앉아 호숫가에 있는 군중들을 설교하기도 했다(마태 13,1). 또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물 위를 걷기도 했다(마태 14,22-23; 마르 6,45-52; 루카 6,16-21). 예수께서는 또 이 곳에서 12사도를 뽑으시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했다(마태 8,5-13; 루카 7,1-10; 요한 4,43-54).

 오늘날 갈릴래아 호수에는 '예수님 배'라 불리는 유람선이 성업 중에 있다. 지난 1986년 1월에 갈릴래아 호수 서안에서 예수 시대의 배 한 척을 발굴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이 배는 2000여년 전에 축조한 배로 밝혀졌다. 학자들은 삼목과 오크로 만들어진 이 배가 길이 8.3m, 폭 2.3m, 정원 13명 규모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탔던 성경 속의 배(요한 6,16-21)와 흡사하다고 밝혔다.

 상술에 밝은 유다인들이 이 배의 복원된 모습을 똑같이 만들어 '예수님의 배'라 부르며 순례자들을 호객하고 있다. '예수님의 배'에 승선하면 손님을 기분좋게 하면서 주머니를 열게하는 유다인 특유의 상술을 경험할 수 있다. 배가 선착장을 떠나면 선상 국기 게양식을 하며 국가를 틀어준다. 또 각 나라말로 안내 방송을 하고 간간히 흘러간 대중가요도 틀어준다. 유람이 끝나면 각 나라말로 인쇄된 '예수님 배 승선 확인증'도 발급해 준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기를 원한다면 갈릴래아 호수 동편에 자리잡은 엥게브(En Gev)리조트를 적극 권한다. 호수와 바로 붙어 있어 한적하면서도 갈릴래아 호수를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예수의 제2 고향' 카파르나움 "

구원의 기쁜 소식 전한 '위로의 마을'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가르침과 무수한 기적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의 예언대로 7세기 무슬림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래 지금까지 페허로 남아있다. ▲20세기에 발굴된 베드로 집터. 이 집터는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하신 후 묵었던 안식처로, 카파르나움이 예수뿐 아니라 사도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위로의 마을임을 느끼게 해 준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하셨던 카파르나움 회당터. 오늘날 발굴된 이 터는 예수 시대 회당을 부수고 4세기 이후 개축한 것이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시간을 잊고 마냥 그 자리에 서 있을 때가 있다.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 북서부 연안의 작은 어촌 카파르나움은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환경이 주는 평온한 분위기여서 마냥 머물며 살고 싶은 마을이다. 카파르나움은 히브리 말로 '위로의 마을''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제2 고향이다. 복음서에서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고을'(마태 9,1), '예수의 집이 있는 곳'(마르 2,1)이라고 불릴 만큼 예수의 활동 중심지였다. 예수시대 카파르나움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예루살렘을 잇는 교통 요충지로 로마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세관도 있던 번화한 행정도시였다.

 이 고을 이름이 '카파르나움'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경제지역''제한지역'이란 뜻의 히브리 말 '케파르 테구민'에서 나왔다는 설. 그 이유는 카파르나움이 갈릴래아와 골란 지방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은 '나훔의 마을'이란 뜻의 히브리 말 '케파르 나훔'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예언자 나훔의 고향인 '엘코스'가 원래 이 마을 이름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그를 존경해 '케파르 나훔'으로 고을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후자를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예수는 이 곳에서 이 지역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삼았다. 또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비롯해 백인대장의 종, 중풍병자, 나병환자, 마귀들린 자들을 고쳐주었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는 기적을 행했다.

 예수는 아울러 이 곳에서 율법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설교했다. 하지만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의 설교와 놀라운 기적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는 너무나 실망해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루카 10,15)고 저주했다. 예수의 말 때문인지 영화롭던 카파르나움은 7세기 초 페르시아 군대의 침입으로 폐허가 됐다.

 카파르나움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가장 잘 확인된 성지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예수 시대 카파르나움은 그 길이가 1km에 달했다고 한다. 2세기 말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대거 카파르나움으로 이주해 이 도시는 더욱 번창해졌다. 그래서 4세기 경에는 예수가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던 카파르나움 회당을 부수고 그 자리에 더 큰 회당을 세웠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교회 창설 초기부터 카파르나움에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집에 모여들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기도했다고 한다. 5세기 경 갈릴래아 지역 신자들은 베드로의 집을 개축해 팔각형의 큰 성당으로 꾸몄다. 하지만 이 성당은 614년 무슬림 페르시아군의 침입으로 페허가 됐다. 그 후 1200여년 동안 베드로의 집은 카파르나움과 함께 인적이 끊긴 채 무성한 들풀만 자라는 성경 속의 안식처가 되고 말았다.

 카파르나움에 대한 본격적 발굴작업은 1894년 작은형제회가 일대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됐다. 작은형제회는 1921~1926년, 1968~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발굴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회당과 베드로의 집터를 발굴했다.

 베드로의 집은 카파르나움 회장에서 약 30m 떨어져 있다. 베드로의 집은 5세기 경에 지은 팔각형 성당 한 가운데에 보존돼 있다. 이 곳이 베드로의 집터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리스 말로 쓰여진 '베드로'라는 푯말과 어선의 그림을 이 집에서 발굴했기 때문이다. 현재 작은형제회는 베드로의 집터를 보존하려 그 위에 팔각형 성당을 지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베드로의 집은 곧 예수의 집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집에 자주 묵었다(마르 1,29-30; 2,1; 3,20-21; 요한 1,38-39; 2,12). 예수의 숨결과 체취뿐 아니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열정과 번뇌가 배어있는 집이다. 온 힘을 다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지친 몸을 뉘었던 예수의 안식처를 카파르나움은 품고 있다. 카파르나움 베드로의 집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전 사도들의 피난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발현해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준 타브가와 크게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체취를 느끼고 예수의 안식처에서 믿음의 삶을 되돌아 보고자 위로의 마을 카파르나움에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람이 꽃의 눈물을 보고 꽃의 소리를 전해 주듯, 순례자들은 이 곳에서 인간 예수를 보고, 돌같이 굳은 영혼을 살같이 부드럽게 되돌리는 생명의 소리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참행복기념성당 "

"행복하여라, 이 땅을 밟는 사람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장소에 세워진 성당. 이 성당은 8가지 참행복의 가르침과 당신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상징해 팔각형에 돔을 얹은 모양으로 지어졌다. ▲한 순례자가 참행복선언기념성당 감실 뒤편에 마련된 십자가상 밑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성당 뒤편 회랑에서 바라본 갈릴래아 호수 전경. 절기에 따라 새 옷으로 갈아입는 구릉이 변화무쌍한 갈릴래아 호수와 조화를 이뤄 순례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일곱 우물'이 있던 타브가 "

예수께서 빵의 기적 행하신 '외딴 곳'


▲부활하신 그리스도 발현 기념 성당의 다른 이름은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다. 뜰에는 이곳에서 사도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내 양떼를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받았음을 기념하는 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타브가 성당 중앙 제대 모습. 5세기경 제작된 모자이크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4개만 보인다. 나머지 빵 한개는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한 곳으로 전해지는 바위 위에 마련된 제대에서 매일 거행되는 성체성사가 채워주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발현 기념 성당에 있는 `그리스도의 식탁` 바위.

 사막에서 우물은 '생명의 샘'이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마르지 않는 우물을 '생명'과 '구원'의 상징으로 비유(시편 36,7-9;이사12,3)하곤 한다. 예수께서도 야곱의 우물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면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고 말씀하시면서 우물에 빗대어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자임을 드러냈다.

 모든 인간에게 마르지 않는 우물인 예수께서 '외딴 곳'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다.(마르 6,30-44; 마태 14,13-21; 루카 9,10-17; 요한 6,1-15). 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 곳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며 수위권을 부여하고, 교회를 '구원의 우물'로 삼으셨다.

 오늘날 성경고고학자들은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고 발현하신 곳이 '일곱 우물'이 있던 타브가 지역이라고 추정한다. 타브가는 예수께서 '참행복'에 관해 산상설교를 했던 '쉐이크 알리'산 아래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 연안에 있다. 일곱 우물이 있어 예수 시대 이전부터 '일곱 우물'이란 뜻의 그리스말 '헤프 타페곤', 히브리말 '엔 세바', 아랍말 '아인엣 타브카'로 불렸다.

 타브가는 성경의 표현대로 '외딴 곳'(마태 14,13; 마르 6,32)이다. 오늘날도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만 메아리칠 정도로 한적한 곳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거주했던 카파르나움에서 약 3km 거리에 있는 외딴 이 곳을 간혹 찾아와 군중을 피해 조용히 쉬며 기도를 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40개를 전하고 있다. 이 기적 이야기들 가운데 네 복음서 모두가 유일하게 전하고 있는 게 바로 '빵의 기적'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빵의 기적이 예수의 일생에서뿐 아니라 구원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던 그 때로 되돌아가 보자. 세례자 요한이 살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유다인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 외딴 곳으로 갔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보자 쉬는 것을 포기하고 설교를 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

 해가 기울자 예수께서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에 따라 저녁 식사를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간단히 허기를 때우는 차원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필립보에게 군중들을 먹일만한 저녁거리를 구할 수 있는지 슬쩍 물었다. 제자들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곧잘 복음서에 등장하던 필립보는 곧바로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200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왜 하필 200데나리온일까!  200 데나리온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값의 거의 일곱 배나 되고, 예수 시대 농사꾼의 6개월치 품삯에 해당된다. 성경(마르 6,37)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면, 이 날 예수의 제자들은 적어도 200 데나리온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

 잠시 분위기가 무거워질만한 순간 안드레아가 예수께 한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다고 알려준다.

 성서신학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우연한 숫자가 아니라고 해석한다. 빵 다섯은 '모세오경'을, 물고기 두 마리는 '모세오경 이외의 책들'과 '예언서'를 나타낸다고 한다. 구약의 이 책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을 주기에는 부족하며, 예수만이 구원의 갈증을 해결해 주실 유일한 분임을 드러내는 기적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마르코ㆍ 마태오ㆍ 요한 세 복음서는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장소를 모두 '외딴 곳'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루카복음만이 유일하게 '벳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벳사이다는 타브가와 정반대 지역이다. 카파르나움으로 타브가는 서쪽, 벳사이다는 동쪽에 있다.

 유일하게 루카만이 빵의 기적 장소를 밝히는데도 베드로와 안드레아, 필립보의 출생지인 벳사이다에서 빵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게 성서고고학자들의 일반적 입장이다. 우리말로 '어촌'이란 뜻의 벳사이다는 많은 상인들이 모여드는 항구도시로 결코 외딴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루카는 다른 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예수의 목격 증인이 아니고, 팔레스티나의 지형도 잘 모르는 저자였다는게 이들의 설명이다.

 빵의 기적 장소가 타브가라는 증거는 교회 전승에서 찾을 수 있다. 타브가는 초대교회 때부터 순례의 중심지였다. 350년께에 예수께서 빵을 얹은 바위를 제대로 하는 성당이 건축됐고, 많은 순례자들이 이 곳을 방문해 바위의 작은 돌들을 가져갔다. 또 450년께에는 비잔틴 양식의 새 성당이 세워졌고, 그때 설치한 모자이크를 지금도 볼 수 있다.

 타브가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군과 637년 무슬림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된 후 1300여년간 폐허로 남아있다 1932년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됐다.

 지금의 타브가 성당은 독일 가톨릭 교회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1982년 봉헌된 이 성당은 베네딕도회 예루살렘의 성모승천수도원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성당 주변 성지는 '독일 성지회' 소유다.

 넓은 정원을 지나 성당으로 들어서면 제대 주변으로 5세기 비잔틴 성당의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바닥 모자이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는 바위 바로 위에 제대가 있고, 바위 밑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4개가 들어있는 성합이 모자이크 돼 있다. 빵 4개만이 모자이크가 돼 있는 까닭은 매일 미사를 통해 행해지는 성체성사가 나머지 하나의 빵이기 때문이다.

 타브가 성당에서 걸어서 약 500여m 북쪽으로 가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발현 기념 성당'이 나온다.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요한 21장 1-17절과 관련된 성당이다. 이 곳 역시 초대교회 때부터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고 성당이 세워졌으나 1263년 무슬림들에 의해 파괴된 후 폐허로 남아있었다. 1934년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새롭게 건립된 것으로 지금의 성당 안에는 '그리스도의 식탁'이라는 뜻의 라틴말 'mensa Christi'라 불리는 바위가 잘 보존돼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바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고 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알고 가면 재미 두 배 

 1. 빵의 기적이 행해진 바위와 그리스도의 식탁으로 불리는 바위는 만져볼 수 있다. 단 무작정 제단 위로 올라가는 것은 금물. 안내자를 통해 성당지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만져볼 것.

 2. 타브가 성당 바닥 모자이크는 지금도 발굴중임. 찬찬히 모자이크를 살펴보면서 섬세한 비잔틴 예술을 감상한다면 초대교회 신자들 신앙심을 엿보는 의미있는 순례가 될듯.

 3. 타브가 성당 제단 왼편에 작은 기도방이 있음. 외딴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을 묵상해 보는 좋은 시간이 될듯.

 4. 부활하신 그리스도 발현 기념 성당과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호수변 돌담 너머에서 촬영하는 것이 좋음.

 5. 놓칠 수 없는 먹을거리- '베드로 물고기'.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함께 구워 먹었다고 해서 불리는 일명 '베드로 물고기'를 시식해 보시길. 부활하신 그리스도 발현 기념 성당을 끼고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호수변에 허름한 식당이 있음. 간판도 없는 이 집이 '베드로 물고기 구이'전문점.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종업원들이 웬만큼 한국말을 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