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 희 문 |
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남터에서, 절두산에서, 서소문 밖네거리에서 천주교인들은 그저 천주를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목을 잘리고 매를 맞아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처형지에는 그 때의 처참했던 순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서울 특별시 중구 신당동 을지로 7가에 묵묵히 서 있는 광희문(光熙門)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혹은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으 감동을 간직하고이싸. 지난 1984년에는 신당동 천주교회에서 성인 유해 순회 기도회를 바로 이곳에서 지내기도 했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을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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